[공론장칼럼] 아쉬운 주민참여공론장? 그럼에도 기대해야 하는 이유
이다현(희망제작소 연구원)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주민참여가 강조되고 있다. 정책결정과정에 주민이 파트너로 참여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공론장을 통해 중요한 정책에 대해 주민들이 토론하고 결론을 도출해내는 방식으로 점차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공론장을 통해 주민이 정책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주민참여 공론장은 주민주도성, 주민권한 강화의 측면에서 점차 확대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결과에 다소 실망감(?)을 내비치기도 한다. 결과물이 그들이 기대한 것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민참여 공론장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 주민참여 공론장이 필요한가? 주민참여 공론장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주민참여 공론장에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동안의 공론장 돌아보기>
주민참여 공론장이 활성화되기 전에 공론장은 어땠을까? 공론장이란 이름을 쓰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정책적 사안에 대해 ‘토론회’나 ‘공청회’, ‘설명회’라는 이름으로 주민참여를 독려했다. 주민은 전문가끼리 토론하는 모습을 객석에서 지켜보거나, 이미 결정된 단계의 사업설명을 들으며 정당성을 확보하는 들러리가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주민의 의견을 듣고 반영하려는 의지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주민들이 참여할 이유가 점점 없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주민참여 공론장은 이런 불편함에서는 자유롭다. 목적 자체가 주민의 눈높이에서 제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민끼리 둘러앉아 비슷한 눈높이로 평등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토론이 서툰 주민을 위해 대화촉진자를 두거나, 포스트잇에 의견을 적게 하는 등 모두가 참여할 수 있게 여러 장치를 둔다. 내 이야기를 이렇게나 듣고 싶어 하다니, 머리를 쥐어짜내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내 말이 토론의 취지에 부합할지 고민하는 부담도 적다. 가볍게 이야기하고 아니면 다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주민참여 공론장은 참여만족도가 비교적 높을 수밖에 없다.
<주민참여 공론장, 새롭고 공적인 것을 내놓아라>
주민참여 공론장을 개최하는 주최 측(보통은 정부)의 목적은 본인들이 놓쳤던 세세한 부분을 주민이 제안하여 그 빈틈을 메우거나, 여러 의견을 수렴하여 정책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있다. 시간과 비용을 들인 만큼 이런 목적에 맞는 혁신적 제안을 해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그 기대와 다소 다를 수 있다. 이미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거나(예를 들어 찾아가는 복지서비스), 아니면 딱히 해결방법이 없는 민원들(예를 들어 쓰레기무단투기)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수위도 매우 들쑥날쑥하다. 이 결과를 어떻게 반영할지 난감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과연 ‘공공적’인가에 대한 의심도 있다. 사익을 추구하는 주민의 의견은 아닌지, 편협한 정보만을 가지고 도출한 것은 아닌지,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내놓은 결과는 아닌지 등의 걱정이다. 이런 불안감은 주민참여 공론장 자체의 회의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주민의견을 어떻게 반영해야 할까>
주민참여 공론장의 결과가 실망스럽다면, 혹시 주민들이 문제정의부터 해결방안까지 제시해주길 기대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주민참여 공론장은 (경우에 따라 형식은 다르지만) 여러 생각들을 토론을 통해 몇 개의 의제로 구체화시킨다. 그리고 우선순위를 매겨 결과물로 제출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운영과정이 있지만 반영해야 할 것은 마지막 단계만이 아니다. 주민들이 어떤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어떤 의견을 냈는지 그 과정도 중요하다. 하지만 결과에만 집중하다 보면, 혁신적인 결과물을 낼 때까지 주민들을 쥐어짜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론장은 여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나온 의견을 사회 다양한 주체들이 어떻게 풀어낼지 고민이 함께 되어야 한다. 왜 주민들은 기존에 있는 정책을 모르고 있을까? 지역마다 비슷한 문제들이 제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더 많은 주민들이 공론장에 참여하지 않을까? 참여하기 싫어하는 주민들의 의견은 어떻게 들어야 할까? 등이다. 이것을 중앙정부, 지방정부, 공공기관, 시민단체, 주민 각각의 주체들이 고민하고, 서로 협력하려는 노력이 빠져있다.
이런 노력 없이, 공론장만 열어놓고 주민들이 모든 것을 해결할 만능열쇠를 내놓길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하다. 주민주도, 주인의식, 자발성이라는 미명으로, 주민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책임을 지우는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주민들은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무엇이 공공적인 것인가>
그동안 주민의 의견은 사소하다는 이유로 공적인 논의에서 빠져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환경문제를 공공적으로 논의할 때 미세먼지, 원자력, 4대강 개발과 같은 범국가적 의제는 자주 다뤘지만, 쓰레기 무단투기나 음식물쓰레기 냄새와 같은 문제는 어떻게 다뤘는가? 개인적 노력으로 알아서 해주시길 바라지 않았는가? 하지만 주민들은 이런 생활문제를 일상에서 매번 겪는다. 그래서 그것이 주민에겐 중요한 문제이다.
공론장이라하여 처음부터 ‘공적인’ 의제만 요구하다 보면 주민은 할 얘기가 딱히 없어진다. 당장 내가 겪는 문제들이 있는데, 그것이 공공적인 문제인지, 혹은 나의 개인적인 문제인지 스스로도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론장에서 이런 사적인 이야기들이 모여 공적인 것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능력이 있는 개인들이 공론장에서의 자유로운 토론과 합의를 통해 합리적으로 공공성을 구성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 토론의 과정에서 자연히 사적인 이익은 배제되고, ‘우리’의 관점에서 남은 문제들을 다루게 된다. 그래서 공론장은 서로 다른 개인들이 합의를 통해 공공성을 도출해내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주민참여 공론장에서의 결론이 과연 공공적인가라는 의심은 공론장 자체에 둘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충분히,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개방하고 설계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현재 우리 사회의 공공성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나눌 수 있는 크고 작은 공론장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
<나가는 말>
주민참여 공론장이 확대되고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현 상황에서, 공론장의 중요성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그 주제의 적절성, 진행의 미숙함, 절차적인 문제 등의 시행착오를 겪기도 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공론장의 주제가 될 수 있다. 공론장 만능주의 아니냐고? 그것보다는 토론문화의 일상화로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일상적 차원에서 주민들이 공적으로 토론하는, 그곳이 바로 공론장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질문을 던지고 함께 토론해보자. 이를 기반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